2019년7월23일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에있는 文貞公潛谷 (잠곡)김육선생과 그의 아들忠肅公(충숙공)歸溪(귀계)金左明(김좌명)선생신도비를 보고 경기도 지정문화재 기념물제177호로 지정된 청풍김씨 문의공파 묘역을 둘러보고왔다
▲삼패동 平丘마을에있는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己卯名賢 金湜 선생묘, 金時默선생묘 이정표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설명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산속에있는 무명비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신도비 이정표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神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神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神道碑
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서울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열중해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정치적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 등과 함께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다. 이어 형조좌랑·호조좌랑·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4월 조광조·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이는 당시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평가되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급제자 발표 닷 새 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고, 며칠 뒤에는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그것은 현량과 실시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신상(申鏛)과 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해 대사성에 추천했으나 중종은 이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상과 안당의 거듭된 상계(上啓)로 마침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에 숨었다가 "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빈 산사위에 구름이 떠가네 군신간의 천년의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 뒤 선조 때에 이조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된 조광조와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훈구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폈다. 그 내용으로는 미신 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 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문인으로는 신명인(申命仁)·오희안(吳希顔)·목세칭(睦世秤)·김윤종(金胤宗)·조경(趙瓊)·홍순복(洪舜福)·윤광일(尹光溢)·이세명(李世銘)·신영(申瑛)·김덕수(金德秀) 등이 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墓가 보입니다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墓와 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 墓碑
配- 정경부인 전주이씨 쌍봉 묘입니다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父親墓 金叔弼墓와 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父親墓 金叔弼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文毅公(문의공) 金湜(김식)父親墓 金叔弼墓와 墓碑
配-사천목씨 합장묘입니다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 이정표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 ~좌측 文人石 ,望柱石,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 ~文人石 ,望柱石, 墓碑
▲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原府院君 金時默墓
부인두명과 합장묘입니다
김시묵(金時默,1722~177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이신(而愼)이고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의 아버지로 영조 때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776년(정조 즉위) 딸이 왕비로 진봉되면서, 영의정·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묘역에는 혼유석(魂遊石), 장대석(長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묘표 등이 있다. 봉분의 왼쪽에 있는 묘표는 1773년에 세워진 것으로 무늬 없는 대석 위에 대리석으로 만들 비신(碑身)을 올렸고, 그 위로 이수(螭首)를 올렸다. 문인석은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퉁퉁하며 머리 부분이 1/3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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