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7월23일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에있는 文貞公潛谷 (잠곡)김육선생과 그의 아들忠肅公(충숙공)歸溪(귀계)金佐明(김좌명)선생신도비를 보고왔다.
▲평구마을 입구 안내도~
平丘(평구) 마을은 삼패2통으로 행정동은 양정동11통이며 법정동은 삼패동이라고 한다.
자연마을 名은 평구(平丘),쇠꼬리,혹은 소쿠리마을로 불리는데 이는 고려사 병지참역조에 나오는 평구(平丘)圖(지금의삼패동)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세종실록 지리지에 관동지방(춘천,원주)과 영동지방으로 가는 길목인 삼패동지역(주동쪽70리지점)에 평구역이 위치해 있어 고려시대 이후 줄곧 평구라는 지명을 사용해왔으며 마을 모양이 쇠꼬리를 닮았다 하여 쇠꼬리 마을 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금송아지가 산으로 도망쳐 동굴속에 숨어들어 꼬리만 남았기 때문에 쇠꼬리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구(平丘)마을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기념물제177호로 지정된 청풍김씨 문의공파 조상묘 5기-김식,김시묵,김육,김좌평,김성룡 의 묘와 신도비가 있어 이곳이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의 명당지임이 입증되어 매년 풍수지리를 배우는사람들이 찿는곳이라고 한다
▲평구(平丘)마을로 들어서자 潛谷.歸溪先生神道碑(잠곡 귀계선생 신도비)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歸溪金左明先生神道碑 좌측이 潛谷김육先生神道碑
▲歸溪金左明先生神道碑
▲潛谷金堉先生神道碑
▲潛谷金堉先生神道碑
▲ 歸溪金左明先生神道碑
▲ 歸溪金左明先生神道碑
▲ 歸溪金左明先生神道碑
歸溪 金左明: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1616년 11월 19일에 태어나 1671년 3월 9일에 죽었다.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 귀천(歸川),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부친은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 조부는 김흥우(金興宇), 증조부는 김비(金棐), 외조부는 윤급(尹汲), 장인은 신익성(申翊聖), 아들은 김석주(金錫胄)이다.
163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박사(博士) · 설서(說書)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전임했다. 1646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1648년에 고양 군수 송희업(宋熙業)이 청탁을 분분하게 하는 조정 인사들을 전문(轉聞)한 가운데에 끼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652년에 사간이 되어 이시방(李時昉)에 대한 논핵을 반대했고, 이후 동부승지가 되었다. 1656년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이후 우승지 · 도승지 · 이조참판 · 부제학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57년에 형조참판 · 대사헌 ·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1658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1659년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부모의 상사(喪事)에 수도(隧道)를 만든 일로 민유중(閔維重)으로부터 참람했다는 논핵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했다. 이 일로 인하여 송시열(宋時烈) 등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1661년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이때 부친이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게 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부친의 유지(遺志)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사헌 · 도승지를 거쳐 예조 참판을 지냈고, 1662년 공조 · 예조의 판서를 역임할 때 현종 즉위 초에 좌참찬 송시열의 제안으로 전라도 산군(山郡)의 대동법(大同法)이 중단된 것을 재차 주창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전라감사 서필원과 함께 『전라도대동사목(全羅道大同事目)』을 주관하고 강정(講定)하여 그 이듬해에 발표하였다. 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에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았고, 병기와 군량을 충실히 하였다. 한 때 호조판서가 되어 크게 국비를 덜어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 1670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내시들 횡행(橫行)의 폐단을 진달하고, 좌부승지 이지익(李之翼)이 상소하여 옥안의 처리 문제로 논척했으며, 소경청 당상이 되었다.
사후 1672년에 아들 김석주(金錫冑)가 무신자(戊申字)로 문집을 간행하였고, 1673년에는 아들 김석주가 묘지명을 지었다. 1676년에 현종묘정 배향(顯宗廟庭 配享)을 결정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려 영의정에 추증하고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묘는 남양주 삼패동에 소재하며 신도비도 남아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귀계유고(歸溪遺稿)』(규장각 소장)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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