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묘

박동량선생묘(朴東亮先生墓)

신용짱 2019. 3. 1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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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3월10일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의 묘(墓)를  탐방 하고왔다


 ▲朴東亮先生墓 입구의 재실로 보이는 건물~충익재-반남박씨 오창공파 재실

 ▲朴東亮先生墓 입구의 재실로 보이는 건물~충익재-반남박씨 오창공파 재실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박동량은 1590년(선조 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세상을 떠난 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군자봉 동쪽 능선에 있으며, 바로 밑에는 아들 미()의 묘가 있다. 묘역은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묘비와 망주석 등이 있다.

 ▲朴東亮先生墓 설명

朴東亮(1569~1635) 先生은 朝鮮 中期의 文臣으로 本官은 潘南, 자는 子龍, 호는 梧窓, 기재. 봉주이다.

1590년(선조23) 증광시에 兵科로 及第하여 戶曹와 兵曹의 좌량을 역임하였으명

1592년 壬辰倭亂 때 兵曹의 좌량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도승지에 거쳐 1596년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왜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해 수안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으로 3년간 수묘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 금부사가 되었다.

선조 때 한응인, 유영경,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때와 인조반정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유배와 복관을 반복하다가 후에 아들 彌(미)와 의에 의해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종되었다.

저서에 기재사초, 기재잡기, 방일유고 등이 있고 , 그림으로 계산초정도가 있다. 시호는 충익이다.

묘역 아래에는 아들 금양위 박미(1592~1645)의 묘가 있으며,

신도비는 묘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250m 지점에 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있다.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 이 짓고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썼으며, 형조판서 민유중이 전자하였다


 ▲朴東亮先生墓

 ▲朴東亮先生墓 碑

 ▲朴東亮先生墓碑

忠翼 朴公東亮之墓-貞敬夫人閔氏합장을 알리는 묘비

有明朝鮮忠勤貞亮效卽協策扈  聖功臣判義禁府事錦溪君 贈領議政謚忠翼朴公東亮之墓 貞敬夫人閔氏부

(유명조선충근정량효절협책호 성공신판의금부사금계군 증영의정익충익박공동량지묘 정경부인민씨부)

 ▲朴東亮先生墓

 ▲朴東亮先生墓 바로아래 아들 미(彌)의묘와 묘비

 ▲朴東亮先生墓 바로아래 아들 미(彌)의 묘비

有名朝鮮錦陽君朴公彌之墓(유명조선금양군박공미지묘)貞安翁主부(정안옹주부)

 ▲朴東亮先生墓 와 아들 미(彌)의묘와 묘비


▲朴東亮先生神道碑와 아들彌의神道碑碑閣

▲朴東亮先生神道碑와 아들彌의神道碑  설명

▲朴東亮先生神道碑와 아들彌의神道碑

▲朴東亮先生神道碑

▲朴東亮先生아들彌의神道碑

▲朴東亮先生과 아들彌 양선생 事跡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