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여행

설악산 백담사,영시암

신용짱 2018. 6. 1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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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6월13일(수)설악산 대청봉 산행을 백담사부터 시작하는 산행을 다녀왔다

산행중 구경하게된 백담사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디카속 백담사의 모습을 펼쳐봅니다

백담사(百潭寺)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62번지 해발약460m 지점에 위치한 사찰로 백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이 절에 관한 기록으로는 「설악산심원사사적기( )」와 한용운()이 편찬한 『백담사사적()』이 있다한다

백담사(百潭寺)일주문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에는 비금사()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광학()·각동()·영희()·법찰()·설흡()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 동훈()·준희()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극락전·벽운루()·선승당()·동상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원명암()·백련암()·오세암()·봉정암() 등이 있었으며, 동훈·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라고 개칭하고, 의준()·해섬()·취웅()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재화()·신열()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이 태현()·태수() 등과 인법당()을 짓고 심원사()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 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담사 [百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담사(百潭寺)일주문

현재의 이름인 백담사는 7차에 걸친 실화가 닥쳤고, 그 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담사 [百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담사(百潭寺)조감도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일어난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범종까지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의 주지 인공()은 사무()를 오세암에서 행하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와 인순() 등이 그를 도왔다.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시주받은 1,786원 30전으로 1919년 4월에 법당 20칸과 화엄실() 20칸을 건립하였으며, 1921년 봄에는 응향각() 및 사무실 30칸 등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를 열었다.

한용운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담사 [百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담사 설명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의 대웅보전(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선원()·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殿)이 있다.

산내의 부속 암자는 현존하는 것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이 많다. 한용운은 유지()만 남아 있는 역사 미상의 암자로서 동암·백련암·원명암·은선암()·극락암()·오봉암()·복호암()·지장암()·흥성암()·자장암()·금선암() 등 11개가 있었다고 『백담사사적』에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1777년에 창건한 통선암()과 심적암(), 1864년(고종 1)에 역암()이 창건하였고 1919년에 훼철된 보문암(), 1884년에 창건한 축성암() 등이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주석하다가 관음진신()을 친견한 뒤 관음암()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섯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 1648년 유학자 김창흡()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 구전으로 전해져오던 옛 절터에 1903년 원호()가 세운 원명암()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담사 [百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담사 일주문에서  백담사(百潭寺)로 가는길 춘성대선사 탑과 탑비

주차장에서 백담사(百潭寺)로 향하는 수심교 

백담사(百潭寺) 금강문 향하는 수심교에서 바라본 백담사 계곡의 돌탑

백담사(百潭寺) 금강문~ 사찰 입구의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한다. 흔히 인왕상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어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백담사(百潭寺) 금강문 좌측~왼쪽을 지키고 있는 역사가 밀적금강이다.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지니고 부처를 보호한다는 신(神),항상 부처 곁에서 그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들으려고 하므로 밀적(密迹)이라 한다

▲백담사(百潭寺) 금강문 우측~오른쪽을 지키는 역사가 나라연금강

나라연금강은 천상의 역사(力士)이자 불법의 수호신으로 나라연금강()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된다고 한다. 두 금강역사중 하나인 밀적금강과 함께 사찰 양쪽에 서서 수문장 역할을 한다

 

백담사(百潭寺) 란 현판이 있는 출입문~불이문인듯

백담사(百潭寺)세루당이란 건물

백담사(百潭寺)종루

백담사(百潭寺) 스님들 수행공간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입구 만해 한용운 흉상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 아명은 유천().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 충청남도 홍성 출신.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전시물~만해 한용운 동상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전시물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용운 [韓龍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전시물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전시물

백담사(百潭寺)만해기념관 전시물

백담사(百潭寺)요사채

백담사(百潭寺)만해당

백담사(百潭寺)나한전

백담사(百潭寺)나한전 내부

백담사(百潭寺) 극락보전앞 삼층석탑

백담사(百潭寺) 종무소건물~법화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네요

백담사(百潭寺) 화엄당이란 현판이 걸린 ~전두환 전대통령 머물던 방

백담사(百潭寺) 전두환전대통령 머물던 방

백담사(百潭寺)극락보전

백담사(百潭寺)극락보전 내부

극락보전에 모셔진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麟蹄 百潭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이 보물제1182호라고 합니다

백담사(百潭寺)기와불사 접수처

백담사(百潭寺)산영각

백담사(百潭寺)풍경

백담사(百潭寺)찻집풍경

백담사(百潭寺) 매점건물

백담사(百潭寺) 만해교육관

▲백담사(百潭寺) 화장실도 깨끗한 신축건물로

수렴동 계곡이 시작됩니다

설담당 부도 이정표

설담당 부도 설명

설담당 부도

 

 

▲영시암

▲영시암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1648년(인조 26)에 창건해 6년간 머물렀다. 그 뒤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691년(숙종 17) 설정(雪淨)이 승당과 비각을 중건했다. 1760년(영조 36) 석존불을 개금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주지 이기호(李基鎬)가 중수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된 것을 1994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雪峯道允)이 중창했다.

 

▲영시암의 야생 맷돼지가 등산객이나 지나는 사람을 따라다니는모습

 

▲영시암의 야생 맷돼지

 

▲다시 찿은 백담사

 

▲백담사에서 셔틀버스를 타기위해 줄서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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