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4월14일 현충사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기념관에 유물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임진장초(壬辰狀草)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임진장초(壬辰狀草)~복제품이라고 합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충무이공전진도첩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징비록(懲備錄)~임진왜란당시 영의정 겸 도제찰사로 전란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던 서예 유성룡이 전장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후손에게 분명히 타일러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위해 전란을 회고한 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태촌선생문집~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고상안의 시문집,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할때 시험감독관으로 참가하여 이순신과 13일을 함께 지낸적이 있다한다
**고상안(高尙顔)
1553(명종 8)∼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개성.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천우(天佑)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진사가 되고, 1576년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 이후 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하는데,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그의 소작이라고도 본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음과 행장에 적힌 치사 후의 농사와 관련된 생활을 볼 때,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었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 効嚬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 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하여 일반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다. 이같은 여러가지 점을 종합하여볼 때 〈농가월령가〉에 나타난 계절감각, 영농내용 등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충무공 이순신 영정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초계변씨별급문기~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1576년 아들의 무과급제를 축하하고자 이순신과 그 형제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준것을 기록한 문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초계변씨별급문기(草溪卞氏別給文記)~복제품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덕수이씨세보 설명~덕수이씨 족보는 1712년 초간본이 간행된 이래 현재 칠간본까지 간행되었다함, 현재 전시중인 족보는1776년에 간행된 삼간본으로 5책 목판본임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德水李氏世譜 ~1776년에 간행된 삼간본으로 5책 목판본임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9호 상주방씨정경부인교지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9호 상주방씨정경부인교지 실물~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후 그의 처 상주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교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7호 무과급제교지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7호 무과급제교지~ 이순신이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제4인으로 급제 하고 받은 교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5호 賜符諭書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5호 賜符諭書 ~이순신이 1594년 전라좌수사겸 삼군수군통제사로 있을때 받은 유서(諭書)~유서란 조선시대 임금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로 이 유서를 내릴때 왕은 발명부를 함께 내려주었다함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4호 賜符諭書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5호 賜符諭書 ~ 이순신이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면서 받은 유서 전라좌수영은 지금의 여수에 본영을 두고 그 소속으로 방답,여도,사도,녹도 발포등 5개 수군 진영과 순천,낙안,보성,광양,홍양 등 5개 고을을 거느리고 있었다함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국보제76호 서간첩(書簡帖)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국보제76호 서간첩(書簡帖)~이순신이 친척들에게 보내 편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국보제76호 난중일기 초고본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국보제76호 난중일기 초고본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국보제76호 난중일기 초고본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3호 기복수직교서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3호 기복수직교서 설명 복제품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6호 사부유서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6호 사부유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옥로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옥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복숭아모양술잔 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복숭아모양술잔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요대(腰帶)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326호 요대(腰帶)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호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호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이순신을 선무 1등 공신 덕풍부원군에 봉하고 상급을 내린 교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2호 충무공증시교지(忠武公 贈諡敎旨)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2호 충무공증시교지(忠武公 贈諡敎旨)~이순신이 전사한지 45년 만인1643년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고자 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린교지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6호 영의정증직교지(領義政贈職敎旨)설명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물중 보물제1564-16호 영의정증직교지(領義政贈職敎旨)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宣祖)는 1604년 6월 25일에 임진왜란에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운 이순신(1545~1598)을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1등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동년(1604)10월 29일에 이순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관작(官爵)과 품계(品階)를 3자급(資級)씩 초천(超遷)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부모와 처자도 3자급씩 초천하도록 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壻)를 2자급씩 초천하고 적장(嫡長)은 세습(世襲)하도록 하여 그 녹봉(祿俸)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영원히 사유(赦宥)의 은전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반당10인(人), 노비(奴婢)13구(口), 구사(丘史)7명(名), 전지(田地)150결(結),은자(銀子)10냥(兩), 내구마(內廐馬)1필(匹)도 사급(賜給)하도록 하였다.
약정(約定)된 사급노비(賜給奴婢)는 13구였으나 당시는 전란의 직후라 국가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사급하지 못하다가 이듬해(1605)정월 19일에야 비로소 전라도 부안과 고산, 충청도 온양과 천안 등지의 관노비 8명을 사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발급한 사패교지가 보물 제156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정된 사급노비 13구 중 나머지 5구는 왜란이 끝난 한참 후까지 사급하지 못하다가 효종 4년(1653, 順治10)2월에 이르러 사급하게 되는데, 이때 작성된 교지가 바로 ‘이순신 사패교지(李舜臣 賜牌敎旨)’이다. 이에 의하면 경상도 안동부(安東府)에 배속되어 있던 예빈시·사재감·종친부 등의 노비를 지급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대왕은 임진란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17년(1793)7월 21일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 비석을 세우는 날의 치제(致祭)에 대하여는 전에 명을 내려 알렸는데, 벼슬을 추증하고 선고(宣誥)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고 전지하였다. 정조의 하명에 따라 증직교지가 같은 날 곧바로 내려졌는데, 이때 내려진 교지가 바로 ‘이순신 증직교지(李舜臣贈職敎旨)’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사패교지와 증직교지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문화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이순신과 관련된 고문서는 교서, 유서, 유지, 무과홍패, 증직·증시교지를 비롯하여 별급문기, 이순신 처 방씨 고신교지 등 14건이 지정되어 있으므로 이순신의 1653년 사패교지와 1793년 증직교지도 지정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