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5월3일 경기도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에있는 황희정승묘(경기도기념물제34호)를 방문하였다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재상이다.
고려 개경(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고려에서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한편에서는 그의 청렴성은 청빈함으로 과장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미화, 신격화되었고, 이후 양반집단 기득권 유지 위해 '황희 신화[를 창조하고 확대했다는 주장이 있다
▲황희선생묘 봉분,장명등,상석 모습
▲황희선생묘 봉분,장명등,상석,좌우 문인석모습
▲황희선생묘 봉분모습~잔듸 식재를 새로한부분
▲황희선생묘 봉분앞 상석
▲황희선생묘 봉분앞을지키는 합장을 알수있는 비석
▲황희선생묘 장명등 모습
▲황희선생묘 봉분앞 좌~문인석모습
▲황희선생묘 봉분앞 우~문인석모습
▲황희선생묘 봉분앞 좌~무인석모습
▲황희선생묘 봉분앞 우~무인석모습
▲황희선생묘 봉분 모습
▲황희선생묘 풍경
▲황희선생묘 풍경
▲황희선생묘 앞 보호수 향나무
▲황희선생신도비각과 비석
▲황희선생신도비
▲황희선 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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