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묘

남연군묘

신용짱 2011. 4. 7. 11:46
728x90

남연군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 뒤 1866년(고종 3)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미국인 젠킨스(Jenkins,F.)를 자본주로, 프랑스 선교사 훼론(Feron)을 통역관으로 삼아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등 약 100여 명의 중국인 청년을 무장시켜 4월 18일 홍주에 정박하고 고덕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병사라고 칭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훼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엄히 하였다. 이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국내외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무덤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또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덩이, 사리도 3개가 나왔다고 이건창(李建昌)은 적고 있다

 ▲남연군묘 앞 비석

    有明朝鮮國顯祿大夫南延君(유명조선군현록대부남연군)

    兼五衛都摠府都승관 贈謚(겸오위도총부도승관증익)

    忠正完山李公諱球之墓(충정원산이공휘구지묘)

    君夫人驪興閔氏부左(군부인여흥민씨부좌)

 



▼2020년2월19일 다시찿아간 남연군묘

▲남연군묘(흥선대원군의 부친)-흥선대원군이 권력에 야심을 품고 경기도 연천군에 모셔져있던 자신의 父母墓(부모묘)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대웅전 자리에 이장하고 이후 태어난 어린 아들(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수년간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남연군묘

▲남연군묘

▲남연군묘에서 바라본 남은들 상여집

▲남연군묘

▲남연군묘 단체인증 10:00

▲남연군묘(10:02)

이곳이 吉地중에 吉地 當代 最高의 明堂자리라고 온전하게 잘있던 가야사 大雄殿에 불을질러 불태우고 대웅전 자리에 흙을 지어와  墓를 썼다는 대원군 이하응. 가야사지에서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면 둔덕 위에 마련한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父親 南延君(남연군) 李球(이구)의 무덤이  있다. 忠淸南道 記念物 제80호로 지정된 南延君(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물들을 세웠다.

李球의 墓는 원래 京畿道 漣川郡 남송정에 있었으나 大院君 李昰應이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明堂을 알아본 결과 이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에 1846년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를 옮기고 난 뒤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고나자 왕족중 만만한 자신의 차남 어린 명복을 12세로 왕위에 오르게하였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지관의 말대로 이곳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가 맞지만 그 2대를 끝으로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어째 지관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만 알고 나라가 사라질 것은


'왕릉 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릉(英陵)  (0) 2011.04.12
남이장군묘  (0) 2011.04.07
조정만묘  (0) 2011.04.04
사릉  (0) 2011.04.04
파주삼릉  (0) 2011.04.04